대뇌망상

저는 공부를 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공부를 잘 하지 못했습니다. 한국 초일류 대학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어디가서 '공부 못 했다' 는 이야기를 듣지는 않을 정도의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다만 제가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대학생이 되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이 글은 성과를 자랑하기 위한 글이 아니기 때문에, 그 내용은 잠시 패스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대학에 와서 가장 잘 고민했다고 생각하는 내용의 핵심은 - '내가 많은 것을 빨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가'였습니다. 고등학생때 그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고민을 충분히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제 고민은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가' 라는 방법론 그 자체에 그쳐 있었습니다. 뭐 그런것들 있잖아요. 단권화, 까먹기 전에 복습, ... 유튜브에 검색하면 나오는 수많은 의대생 공부법같은 방법들이요.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공부법들이 '잘 되는 진짜 이유' 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여러 번 쓰고 읽는 것이 정보를 뇌에 주입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빽빽이를 많이 쓰는 학생이 공부를 잘 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공부를 적게 해도 많은 것을 학습하고, 누군가는 공부를 많이 해도 조금만 학습해냅니다. 깊은 공부는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어떻게 정보라는 것이 전달되어 왔는지 - 뇌가 어떻게 정보를 흡수하는지 - 세계 최고로 다작한 사람은 어떤 메모법을 사용했는지 - 최근 많은 학습 전문가들이 어떤 행위를 추천하는지를 종합해 볼 때, 인간이 학습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는 원리의 본질은 이해와 추상화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이때 '암기'란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현상이고, 문자는 추상화와 기록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암기가 무엇인가?

뇌과학적으로 볼 때 ‘암기’는 무엇인가가 ‘서술기억이 되는 것’입니다. ‘서술기억’이란 ‘뉴런과 시냅스의 연결’입니다. 이때 우리는 감각 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어떤 형태의 정보든 곧이곧대로 저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정보들은 서술기억 및 장기기억으로 옮겨지기 전에 해마에서 폐기처분됩니다. 무작위 난수를 외우는 작업 등에서 맹목적인 인간의 암기력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사고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창의성의 본질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머리에 든 것이 있어야 창의력이든 사고력이든 하는 것들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지식의 재조합은 구글 컴퓨터가 아니라 결국 사람의 머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즉, 구글 컴퓨터에 저장된 내용을 ‘서술기억’ 으로 충분히 많이 만들어야 창의성이라는 것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 맹목적인 암기는 불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이 어떤 지식을 외워서 서술기억으로 새겨넣겠다고 아무리 굳게 마음먹는다고 하더라도 무의식에 의해서 차단당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심장박동을 제어할 수 없듯 의식적으로 우리의 해마를 제어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 이제 생각의 방향이 바뀝니다. 장기기억으로 가는 길의 수문장 해마는 (1)어떤 상황에서 (2)어떤 정보를 신피질로 전달해 넣고 싶어할까요?

좋은 방법 두 가지

(1) 차라리 무의식 넛지를 줘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나의 해마가 새로운 정보를 습득해야만 한다고 인지할만한 상황이나 환경에 놓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구단을 외우지 않으면 선생님한테 혼을 나든, 발표 대본을 암기하지 않으면 당장 나의 사업이 고꾸라지든, 다음날에 전공과목 시험을 보든 … 이런 상황과 환경들 말입니다.

(2) 무작위 난수 암기 연구결과가 암시하듯, 해마는 기존에 뇌에 저장되어 있던 정보와 연결하기 좋은 정보를 장기기억으로 전환해 넣어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화학 시간에 주기율표를 외웠던 추억을 떠올려 봅시다. 왜 우리는 ‘나만알지 펩시콜라’(Na, Mg, Al, Si, P, Si, Cl, Ar) 따위로 원소들의 이름을 외웠을까요? 기존에 알고 있던 어휘들에 엮어 외우니 20개가 넘는 원소 이름들이 의미를 부여받고 금방 외워져 버렸습니다. 연결지어 외우는 것이 훨씬 효율적인 이유는 우리 뇌가 정보를 압축된 형태로 저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집 앞 느티나무, 옆집 소나무, 학교 앞 버드나무를 수없이 자주 마주쳐도, 우리 뇌에는 ‘나뭇잎은 초록색, 가지는 대충 삐쭉빼쭉’ 이라는 추상적 정보만 저장됩니다. 우리의 뇌는 모든 구체적인 정보들을 하나하나 기록해둘 수 없습니다. 그대신 추상(이를 chunking 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이라는 강력한 압축스킬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뇌는 어떤 사건에 연관된 장소, 그리고 그 장소의 분위기, 그리고 그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와 연관된 사람들은 기가 막히게 기억해 버리는 특징이 있습니다.

암기, 이해, 추상, 환경의 관계

따라서 ‘학습’의 핵심은 연결(이해), 압축저장(추상화)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정말 중요하다고 여기도록 만드는 환경입니다. 가정에서 아이의 흥미를 돋우는 교육이 중요한 것도 이것 때문입니다. 공부에 푹 빠져 있는 몇몇 천재같은 친구의 흡수력은 다른 친구들에 비해 어마어마한데, 학습 자료로부터 획득하는 정보를 본인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있기 때문에 이런 친구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암기는 이런 본질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부산물이고, 여러분이 노트에 열심히 적는 문자는 추상화된 지식의 보존을 도와주는 도구일 뿐입니다. 암기를 잘 하고 싶다고 해서 암기를 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암기를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잘 하라고 권고해야 합니다. 이런 암기의 본질도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암기를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차라리 ‘모든 것을 이해하라’ 라는 말이 훨씬 설득력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O를 외치는 세상에서 X를 외치는 사람들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이 블로그는 극단주의적 성향과 지배적인 여론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필자의 분석적인 시각으로 학창 시절에 얻으면 좋은 교육 인사이트와 생산성 컨텐츠를 위주로 포스팅합니다. Chat-GPT 등 생성 도구를 이용하여 작성하지 않습니다. 글은 사람에게 유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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